둘중에 하나
마태 18:18-22

둘 중에 하나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아직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에게 큰 상처를 주고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를 죽일 듯이 달려들었던 그 눈빛만큼은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잘못 편집된 정보로 나를 오해했고, 그 오해는 나에게 살의를 느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밤늦은 시각 만취한 상태에서 달려들었던 그 폭력적 살기는 결국 그를 우리들의 인간관계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했고,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저를 아직도 흥분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나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준 사람입니다. 그는 매우 교만했고, 사람을 바로 보지 않고 비스듬히 기분 나쁘게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해도 귀담아 듣는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이였습니다. 아마 저를 싫어했던 것 같고, 저에 대한 평가를 다른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악한 방식으로 해석해서 전달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괴로운 것은 몇 년이 지났지만 저는 그를 계속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저에게 폭력을 행했던 사람은 연민의 정이 생기는데, 나쁜 정보를 흘린 그 친구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닙니다. 저는 그가 긍정적으로 쌓아가고 있는 업적에 대해서도 무시하고 있고, 그가 정말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 있을 때에도 무시하고 도와줄 생각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를 보면서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사실은 그를 생각만 해도 피가 끓고 있는 분노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를 한번도 용서한 적이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용서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용서할 자신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슴 속에 분노의 씨앗을 버리지 않음으로, 분노를 저의 에너지로 활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제일 하기 힘든 말이 바로 “내가 너를 용서한다”일 것입니다. “용서해줘”는 그래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용서한다”는 말은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어려운 것만 골라서 시키네요.

묵상
둘 중에 하나, “죽기 아니면 사랑하기”
by durumi | 2005/01/18 15:03 | 생활과묵상 | 트랙백 | 덧글(0)
'한우'단상


세상에 온통 우울한 이야기가 많으니 가볍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작하려 합니다. 제 이름과 관련된 일화들인데요, 글쎄, 제 이름을 ‘이한우’로 듣거나 부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오해의 역사는 오래되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날이었습니다. 모두 세반이었고, 각 반의 칠판에다 담임 선생님이 배정된 이름을 써 두셨는데, 아무리 보아도 제 이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반, 저반 돌아다니기를 수차례 하다가 결국 제 이름하고 비슷하게 쓰여 있는 반으로 찾아갔습니다. “이한우 -”하고 출석을 불렀을 때야, 선생님께서 잘못 쓰신 것을 알게 되었고, 저의 학창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의 고향친구들은 “한우야, 소고기 좀 갈라 묵자”며 놀려대기 일쑤였지요. 그러기를 어느 듯 삼십년이 지났습니다.
최근 성공회 수첩에 저의 이름이 잘못 인쇄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수준이 좀 높습니다. 한글은 맞는데, 한자가 틀립니다. 성직자 명단을 보면 李漢牛(프란시스)로 되어있습니다. 아하, 참으로 절묘합니다. 원래의 이름은 낮오자를 써서 ‘漢午’인데, 그만 점을 하나 더 찍어서 漢牛가 되어버렸지 뭡니까? 2004년에 처음 등록해서 2005년까지 연이어서 그렇게 되어있는데, 이것은 물론 단순한 실수일 것이고, 이런 일로 저는 별로 기분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미 삼십년의 내공이 쌓였기 때문이지요. 강화도 있는 어떤 신부님은 “왜, 세례명도 프란시소(!)로 바꾸지 그래?” 하시며 장난을 칠 정도입니다.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한 삼십년 정도 반복하다 보면, 그 분야에 대해 정통하고 이골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한오를 한우라고 남들이 오해하는 역사 삼십년은 무슨 기능적인 것이 아니다 보니 외적인 변화는 있을 수 없고, 저에게 뭔가 내면의 근본적인 태도변화를 요구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한우’라고 할 때의 제 마음의 반응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지내던 차에 지난 연말 우리 수원나눔의집 후원의밤에 글씨를 내어주신 신영복 선생님의 호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쇠귀(牛耳)’라고 쓰시더군요. 단순한 겸양의 표현이기도 하겠지만, 저의 지난 삼십년 시간 동안 계속해서 끊임없이 따라 다니던 소우(牛)자에 눈길이 머물면서, 그 의미가 심상치 않게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오해해서 부르는 이 글자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단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지요.
“한오, 넌 아직 한우야. 그러니까 소처럼, 살아서는 노동으로, 죽어서는 온몸을 다 바쳐라. 고기는 고기대로, 뼈는 뼈대로, 가죽은 가죽대로 쓰임이 있을 터, 너의 소유를 일체 주장치 말라. 소가 언제 자기 의견을 낸 적이 있더냐? 너는 그저 주인이 시키는대로 충성하라. 너는 온전히 남을 위한 존재이다. 듣지도, 깨닫지도, 판단도 말라. 거듭 말한다. 너는 호랑이가 아니라 소이다. 그러므로 네 삶에서 일체의 흔적도 남길 생각을 말아라. 다만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눈물을 흘리는 것만 허락하노라.”
나눔의집은 본질적으로 교회이고, 교회의 본질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이타적으로 사시다가 가셨기에, 그분을 뒤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최고의 규율로 생각해야 할 점은 바로 ‘이타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제 이름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오해의 실수를 통해, 저는 ‘한우’가 제게 주님께서 주신 은총이자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운 과분한 별명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by durumi | 2005/01/18 13:19 | 잡문과 단상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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